형사재판정에 처음 선 순간, 나는 이미 죄인 취급을 받았다.
구속 피고인이라는 이유만으로
나는 포승줄에 묶여 있었고,
수의(囚衣)를 입은 채 법정에 들어섰다.
아무도 내게 “당신은 아직 무죄다”라고 말하지 않았다.
심지어 재판을 지켜보던 방청객 중 일부는
“무슨 죄를 지었길래 저렇게 끌려오나”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.
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.
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에 쓰여 있을 뿐,
현실에선 늘 지켜지지 않는다는 걸.
무죄추정의 원칙은 헌법 제27조 제4항과 형사소송법 제275조에 명시돼 있다.
“피고인은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.”
즉, 재판을 받는 자는 유죄로 단정해서는 안 되며,
국가는 끝까지 객관적 증거를 통해 유죄를 입증해야 한다는 원칙이다.
이 원칙은 우리 법 체계에서
인권 보장의 최전선이다.
그런데 실무에서는
이 원칙이 사실상 무력화되는 장면이 빈번히 나타난다.
구속 피고인의 수의 착용, 포승줄 착용,
심지어 피고인의 변호인이 있음에도
검사는 마치 심문하듯 질문하고,
법원은 그 피고인이 반박할 기회 없이
검찰 주장에 따라가는 듯한 진행을 보이기도 한다.
또한 언론은 **‘체포됐다’, ‘기소됐다’, ‘영장이 청구됐다’**는 표현만으로
누군가를 사실상 유죄자로 만드는 데에 익숙하다.
온라인 포털에 이름이 오르고, 댓글이 달리는 순간
피고인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이미 범죄자다.
현장에서 가장 문제로 지적되는 건
‘사실상 유죄추정 분위기’가 형성된 이후,
재판부가 심리적으로 무죄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.
피고인이 구속 상태일수록
“뭔가 있으니까 구속됐겠지”라는 전제가 재판에 은근히 깔린다.
그 전제는 어느새 판단의 기준이 된다.
즉,
무죄추정은 글로는 강하지만,
현실에선 눈빛 하나, 발언 하나, 언론 한 줄에 의해
무너지기 쉬운 구조 위에 서 있다.
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을까?
당연히 있다.
무죄추정의 원칙을 실질적으로 작동하게 하려면
단순히 법 조문을 되새기는 것을 넘어
다음과 같은 변화가 필요하다.
- 구속 피고인에게 수의를 강제로 입히지 않고,
사복 착용 및 포승줄 생략을 원칙으로 할 것 - 언론에 ‘피의사실 공표’가 되지 않도록 수사단계 보도 제한을 강화할 것
- 판사 스스로 유죄 심증을 피할 수 있도록
재판 진행 방식에서 검찰 중심의 구도를 개선할 것 - 국민참여재판에서 ‘무죄추정 교육’을 선행하여
배심원이 감정 아닌 증거 중심 판단을 하도록 할 것
무죄추정은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
사람 한 명의 삶과 평판, 생존권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다.
하지만 그 원칙은
단지 헌법책 안에서만 강하다면
사실상 아무 힘이 없다.
진짜 정의는
“그 사람은 아직 죄가 확정되지 않았어요”라고
말해주는 사회 분위기에서 출발한다.
무죄추정은 피고인을 위한 게 아니다.
모든 시민이 언젠가 ‘피의자’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,
나를 지켜주는 마지막 법의 약속이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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